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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락의 [사진의 힘]에 담긴 행위

깃대봉 2012. 11. 10. 11:56

 

최원락의 [사진의 힘]에 담긴 ‘행위’

 

최원락의 [사진의 힘]은 부산 감천동 태극마을에서 한 청년을 대상으로

4년 넘게 작업한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태극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 온 태극도라는

신흥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부산의 대표적 달동네다.

작가 최원락은 이 마을에 사는 한 청년을 치료하는 의사다. 청년은 어릴 적부터 혼자 지병을

앓으면서 가난과 소외에 찌들려 살아 왔고, 의사인 작가는 몇 년 전에 우연히

그를 만나 치료를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의사인 작가는 진료를 하는 도중 청년의

질병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소외를 찾게 되면서 그의 슬픈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그가 사는 동네를 찾았다. 그리고 두 사람과 한 대의 카메라는

오붓하게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마을 골목길을 카메라 메고 다니면서 진료실 밖에서 마을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다.

하루 종일 방안에서 컴퓨터만 하는 청년이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이 마을을 걸어 다니는

시간만큼 그 청년에게 정신적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좋았다.

 

                                                                                                      [작가노트]에서

  ⓒ 최원락, 2008

 

작가는 그 청년이 처한 삶의 위치를 기록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뭔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사실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카메라라는 기계를 통해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그 이미지는 객관적인 사실일까? 아니면 사진으로 객관을 기록한다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어불성설일까?

과학이자 예술인 카메라로 작가는 도대체 그의 삶을 어떻게 기록하고자 한 것일까?

기록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자주 꺼낸 말 가운데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는 게 있다.

공자가《논어》에서 한 말로, 기술을 하되, 지어 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가나 기록자들이 금과옥조로 삼아 온 말이다.

이는 기록의 생명은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에 있다는 객관성의 ‘신화’다.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내가 보는 것이 다르고,

느끼는 것이 다르며 가치를 두는 정도나 해석하는 내용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세계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고 오랫동안 믿어 왔다.

우리가 철저히 믿고 따르는 근대 유럽이 만든 이성과 과학 중심의 근대 세계관이 특히 그렇다.

그렇지만 근대 이전 인도에서나 유럽과 중국의 일부에서는 세계를 감성적이고

주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견해도 가지고 있었다. 그 좋은 예가《삼국유사》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경이(驚異)를 찾아 시나

예술로 기술한 것이야 말로 참다운 과거의 재구성이자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이 보는 역사,

그래서 내가 기록하는 역사도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 최원락, 2010.

 

사진이 역사를 재현하는 중요한 매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카메라가 과학이라서가 아니고,

카메라가 감성의 역사, 나만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빛으로 쓰는 시다.

시와 사진은 은폐와 단절 그리고 배제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그래서 그것들은 역사를 객관의 영역인 과학에서 빼내 창작의 영역인 문학에 위치시킬 수 있다.

사진은 원래는 재현 혹은 증거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역사의 성격을 가졌다.

그렇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 예술의 영역에 위치한다는

점에서는 포스트 근대적 의미에서의 역사의 성격도 갖는다. 결국 역사나

사진이나 모두 그 자체가 객관적이고자 한다 해도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그 때문에 사진은 언제나 해석의 자유와 자유로운 해석의 위험을 함께 갖는다.

 

그렇지만 사진은 누가 그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 이미 발생한 어떤 상황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사진은 그림이나 산문과 마찬가지로 대상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진에 담긴 어떤 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진이 어떤 경험을 증명해 준다는 것은 곧 어떤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자신이 찍고자 하는 것들만 찾아다니며

일방적으로 선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훨씬 넓은 경험을 하고 느끼고

인식하였을 것임에도 프레임 안에 들어와 이미지로 남는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일방적 뜻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은 경험의 배제 혹은

경험의 거부일 수 있다. 사진이 분명히 기록의 증거가 되겠지만 독자적으로

기록을 하기에는 전적으로 미흡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속성 때문에 사진으로 어떤 특정한 대상, 특히 그 대상이 사회적 관계를 가진

사람을 기록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그 사람이 갖는 고유한 관계를 폐기해버릴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그 사람의 삶을 이미지를 통해 카메라를 든 ‘나’라는 존재가 전유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아직은) 아무런 것도 혹은 조금밖에 만들어지지 않았음에도

카메라를 들이대 그 인격과 주변에 존재하는 역사성과 사회성을 일방적으로 전유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사진을 찍는 사람은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을 공격적으로 재단할 수 있어,

침해나, 무시나, 배제를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리를 갖는다.

 

 

  ⓒ 최원락, 2009.

 

사진을 찍는 것을 총을 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장착한 후 목표를 노려 발사하는 행위가 사진 찍기나 총질하기

모두 영어로 load, aim, shoot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다. 총질은 궁극적으로 그 대상을 죽이는 데

목적을 두지만, 사진은 그 대상을 (이미지로) 살리는 데 있다. 사진이 그 대상을

진정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단계가 있다. 라포(rapport)다.

 

라포란 조사 대상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구축한 친근한 인간 관계를 말한다. 라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감정이나 사고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진가는 자신이 속한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서 그 대상의 세계관을 존중하여

그가 경계심을 풀고 벽을 허물도록 인간적 존중을 반드시 쌓아야 한다.

사진가와 대상을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라포를 쌓는다고 해서 그 사진이 갖는 전유의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간극을 최소화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라포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짓밟는 행위이다.

 

ⓒ 최원락, 20010.

의사 최원락은 처음 들어가 본 그 방이 너무나 두려웠다고 했다.

청년이 사는 방벽에 적힌 이상한 글과 무사가 칼을 들고 있는 그림들을 보는 순간

너무나 두려웠지만, 처음의 낯섦과 두려움은 시간이 흐르면서 눈물과 그리움으로 바뀌었고

이내 그 둘 사이에 인간 존중의 라포가 켜켜이 쌓였다. 결국 작가는 카메라라는

도구를 통해 사람을 만난 것이다. 기계를 들이댔더니 이미지가 아닌 사람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사진은 치유적이고, 긍정적이며, 인권적이다.

바로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사진의 힘]이다.

 

사진 찍는 의사 최원락의 [사진의 힘]은 이미지를 통한 물질 만능 소비 시대의

가난과 소외를 기록한 역사가 아니다. 의사와 환자가 직업 공간에서 벗어나

삶의 공간에서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따뜻한 품이 되었다는 휴먼 스토리다.

소위 공공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사회 고발 역사로서의 다큐멘터리는 너무 계몽적이어서

식상하고 편협하다. 섬뜩한 이미지로 자신의 사회 의식을 장광설로 푼다고 해서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태극마을을 한국의 산토리니네, 마추픽추네 하면서 모여드는 것은 한낱

눈요기일 뿐이다. 전국에서 많은 사진 애호가들이 이곳에 모여 그 지붕과 정화조가

빚어낸 예쁜 색감에 연신 셔터를 눌러대지만 그건 그저 그런 빛과

색을 가지고 노는 카메라 놀이일 뿐이다.

 

 ⓒ 최원락, 20010.

 

 

작가 최원락은 그 소재를 보고자 그곳을 찾지는 않았다.

그는 애초에 태극마을 안에 사는 사회 가장자리로 밀려나 가난과 소외에 고달픈 서민들을 보았다.

작가가 본 태극마을에 담긴 빈곤과 소외의 풍경이 한국 사회의 거시 사회사와

무관할 수 없음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거대한 사회의 역사,

소외와 진보를 둘러싼 담론을 기록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은

특정인이 겪는 슬픈 역사와 그에게 그를 어루만져 주고 싶은 따뜻한 마음이다.

그래서 그는 좁고 구부러진 골목, 빈 집, 곰팡이 슨 벽으로

그 슬픈 역사를 재현하고 싶지 않다. 오로지 사람이다.

 

그 소외의 슬픔을 잊기 위해 몸을 그으면서 갈망한 십자가 상처의 허망함 안에

오롯이 담겨 있는 그 사람을 통해 그 슬픈 역사를 재현하고 싶다. 엄마가 그리워 엄마, 엄마 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상처 가득한 손으로 눈물을 닦는 그 얼굴을 태극기로 가린 데서 나는 의사 최원락이

본 그만의 역사 기술을 본다. 나만의 감성으로 쓰는 역사, 그 안에 작가 최원락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그래서 의사 최원락의 휴먼 스토리를 모르는 채 사진들을 보면 그것은 한낱 섬뜩한

자극적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진의 제목과 작가 노트와 함께 보면 그렇지 않다.

슬프고 여린 두 사람의 휴먼 스토리. 이게 바로 [사진의 힘]이다.

 

 ⓒ 최원락, 20010.

 

표현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믿는다. 나는 의사 최원락이 기록한 휴머니즘을 믿는다.

그렇지만 이 이미지로만 그에게 당신의 휴머니즘을 보이기는 민망하다.

그 청년이 보기에 이 이미지는 너무나 잔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폴라로이드 사진이 필요하다. 어느 신록이 우거지고, 감천항에서 따뜻한 늦봄

바람이 불어오는 날, 의사 최원락은 활짝 웃는 그 청년을 폴라로이드에 담아

그 자리에서 그에게 건네주리라. 세상은 아직 사랑할만함을 보여주리라. 사진은 당신을

내 마음대로 전유하는 총질과 같기도 하지만, 우리 둘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기도

함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당신이 말하는 사진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 최원락 -

현직 내과 의사이다.  부산의 시청자 미디어 센터에서 진행한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을

수료하고, 어느 사진 학교에서 암실반 과정을 이수했으며 또 다른 사진 공부 모임에서

3년 간 사진 공부를 한 사진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익힌 열성 학구파다.

 2010년에는 한 차례의 개인전까지 가진 바 있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많이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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