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장군과 진주 뒤벼리 전적비
진주 뒤벼리. 수십 척의 깎아지른 절벽이 짙은 남강 물빛을 받아 한 폭의 동양화를 떠올리게
하는 절경이다. 예전엔 여가를 즐기는 낚시꾼, 빨래하는 아낙네들로 항상 붐볐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도로가 확장되어 차들만이 오가고, 인적은 드문 곳이 되어 버렸다.
인적 드문 뒤벼리 입구에 비석 한 기가 외로이 서있다. 아마 진주에 사는 사람이면
차를 타고 가다 한번쯤 보고는 무슨 비인지 궁금하게 여겼을 것이다.
낚시꾼, 빨래하는 사람들이 붐볐을 때인 1975년 세운 비로, 전면에‘宣武原從一等功臣 嘉善大夫
行慶尙左道水軍節度使 兼 五衛都摠府副摠管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兼 知義禁府訓鍊院事 諡義肅公
崔堈戰蹟碑’ 라고 새겨져 있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은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인물들에게 1605년 내린 공신 칭호이다. 현직 벼슬로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으며, 세상을 떠난 후에 병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의숙이란
시호를 받은 최강이란 분의 전적비라는 말이다.
최강 장군은 1559년 2월 10일 고성 구만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있다가, 임진왜란을 당하자 형에게 “우리 집은 대대로 충효를
이어왔는데 나라가 흔들리는 이때를 당하여 숲속으로 도망가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 마땅히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찌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며 형제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최강 장군은 우선 고향 구만을 노략질하던왜적을 무찌르고
곧 인근 의병장인 대소헌 조종도, 망우당 곽재우 송암 이노, 모촌 이정 등과 함께
합세해 3경상도 일대에서 왜적을 물리친다. 최강 장군의 전적비가 진주에 세워진 것은,
임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 대첩에서도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계(耳溪) 홍양호(1724-1802)가 지은 ‘해동명장전’의 기록에 의하면,
“임진년 10월 적장 등원랑이 싸움에서 이긴 여세를 몰아 함안을 공략하고,
세 길로 갈라져서 곧 진양성을 에워쌌는데 목사 김시민이 군사를 나누어
각 성문을 지키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밤에는 악공에게 명령하여 성문 다락 위에서
피리를 불게 하고 이쪽의 태연함을 보였다. 의병장인 최강과 이달이 고성에서
의병을 데리고 와서 밤에는 망진산에 올라 병졸들에게 줄을 지어 햇불을 들려서
함성을 지르고 북을 치게하니 산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힘을 다하여 싸운 지 5일만에 등원랑이 포위를 풀고 군사를 퇴각시키면서
약탈한 부녀자와 우마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최강이 추격하여 모두 목을 베고 돌아왔다”
라고 하였다. ‘해동명장전’을 지은 이계 홍양호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홍문관 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로 학문과 문장이 당대 최고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최강 장군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뿐만아니라 계사년 2차 진주성 전투에도 참여하고자
고성에서 달려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고성 의병장인 이달과 진주로 구원을 갔다가 적병의 세력이 지난해와 비교가
안되므로 손을 대지 못하고 다시 고성으로 향하였다. 고성으로 향하던 중 함안의
피란민으로 최강을 따라 오던 자 300명이 적의 포위를 당하여 거의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는데, 최강이 말을 타고 달려들어 밤새도록 격전하여 선비와 백성들이
그의 힘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이를 바라보는 자가 그를 가르켜 천하의 용장이라고 하였다.
비록 진주성에 입성하여 적을 무찌르는데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백성들을 위해
적을 물리쳐 천하의 용맹한 장수라는 칭찬을 받았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최강의 이러한 전공을 듣고 가리포 첨사를 제수하였다. 가리포 첨사로 있을 때,
왜적의 함대가 제주 대양까지 쳐들어오자 장군을 화공을 써서 적선을 불태웠다.
이때 화공의 계책은 장군의 형인 의민공 최균에게서 나온 것이다.
전라감사가 이 승첩을 알리자,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 1등을 내리고, 순천부사를 제수하였다.
현재 전남 완도 석장포에는 가리포해전 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그 이듬해 경상좌수사에 오르는 등 내외직을 두루 거쳤으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청백하여 항상 관복을 빌려 입으니 도총관인 서성이 그 청백함에 감복하여
임금께 아뢰자, 가상히 여기고 비단 1필을 상으로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후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을 죽이라는 명을 거부하고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최강장군 전적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뒤벼리에 외로니 서있다. 가급적이면 다른 곳으로
옮겨 진주성 전투에서 쌓은공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숙공의 맏형 의민공 최균 장군"
의숙공 최강이 왜적과의 공을 세울수 있었던 것은 형 의민공 최균의도움이 컸다.
의민공은 최강 장군의 백형으로 1537년 고성 구만에서 태어났다. 아우 의숙공이
가리포 첨사로 있을 때, 공이 마침 같이 있어 왜적 대처방안을 아우에게 이르기를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적군의 전력이 매우 날카로워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그 형세를 보건대 화공법이 맞을 것같다”라고 하여
왜적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 3등을 내렸다.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서 형제가 한 집에 지내면서 우애가 너무 좋아사람들은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했다. 향년 80세였다. 고성 구만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